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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사과의 사람 / 최정란
하늘구름14
2023. 9. 29. 14:11
가장 좋은 사과는 내일 먹겠다고
사과 상자 안에서 썩은 사과를 먼저
골라 먹는다
가장 좋은 내일은 오지 않고
어리석게도
날마다 가장 나쁜 사과를 먹는다
가장 나쁜 사과를 먹고 나면
그 다음 나쁜 사과가 가장 나쁜 사과가 된다
어리석게도
가장 나쁜 선택은 나쁜 선택을 반복한다
오, 제발 이미 다 나빴으니 더 나쁠 게 없기를
나도 안다
가장 좋은 사과를 먼저 먹기 시작해야 한다
가장 좋은 사과를 먹고 나면
그 다음 사과가 가장 좋은 사과가 된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사과 상자에서 가장 좋은 사과를
고르려 할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아픈 사과
검은 반점이 뒤덮인 사과
진물 흐르는 사과
다른 사과들에게 역병을 전염시킬
사과,
불임의 사과나무들 뽑혀나가고
일찌감치 사과밭 밖으로 추방당하고도
흰 사과꽃 솎아낼 철이 오면
사과나무 사이를 맨발로 춤추는 꿈을 꾼다
왜 이렇게 꽃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오는 것일까
투덜투덜 심지어 불평까지 하면서
가장 좋은 사과부터 먹는 습관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쩌다 날아다니는 사과탄에
한쪽 모퉁이가 먹힌
사람이 되었을까
- 최정란 시집, 《장미키스》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