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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옥수수로 남북통일을! “통일영웅에게 묻다 –7편: 국제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

by 하늘구름14 2022.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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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엽기자
김인엽기자
조보근기자
조보근기자
하원휘기자
하원휘기자

통일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경제, 민족사적,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통일은 당위성을 띠고 있는 민족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소수의 의지로 통일이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통일은 한반도 주민, 더 나아가서 세계인들 모두에 의해 진보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모두의 한 걸음이 중요합니다.

“통일영웅에게 묻다”는 모두의 한 걸음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그 한 걸음을 일궈내는 것은 슈퍼맨 같은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우리 주변의 노력가들입니다. 통일을 위해 각 분야에서 노력 중인 ‘영웅’들에게 통일을 묻고, 그들의 시선과 생각을 기사로 전달합니다. 영웅들과의 작은 소통이 큰 희망을 가져오길 바라봅니다.

일곱 번째 통일영웅은 국제옥수수재단의 김순권 박사입니다. 아프리카부터 북한까지 옥수수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살과 뼈를 내준 옥수수박사의 삶을 기사에 담아보았습니다. 작은 휘파람 같이 다양한 곳에 존재하는 통일영웅들의 목소리가 모여 불러올 통일이라는 바람을 기대하며, 기사 시작합니다.

통일영웅에게 묻다 7편: 국제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

일곱 번째 통일영웅은 국제옥수수재단의 김순권 박사입니다. 아프리카부터 북한까지 옥수수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살과 뼈를 내준 옥수수박사의 삶을 기사에 담아보았습니다.

* 인터뷰는 2021년 11월 17일 포항 국제옥수수재단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김인엽 기자: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통일영웅에게 묻다’ 이번 달 인터뷰를 맡은 김인엽 기자입니다. 이번 달은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이시고, 옥수수박사로 유명하신 김순권박사를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인터뷰에 앞서서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순권 박사: 저는 1945년생입니다. 울산 바닷가 농어촌마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김순권이고 지금까지 54년째 옥수수 연구만 해오고 있어요. 2010년도에 경북대학교를 은퇴하고 지금은 한동대학교에 가서 석좌교수로 북한 옥수수 연구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제옥수수재단은 1998년 1월 23일, 제가 북한을 방문하고 와서 100개의 NGO들과 같이 서울에 설립한 것이고 제가 지금 설립자 겸 이사장으로 계속 장기 집권을 하고 있습니다.

Q1: 국제옥수수재단은 지금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A1: 제일 큰 것이 통일 사업입니다. 북한의 주 식량, 북한은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해요. 강냉이가 70%의 북한 주민의 식량입니다. 70%의 강냉이를 증산시켜서 북한 우리 동포들이 배고픔을 해결하도록 하는 그런 사업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것은 100만 북한 어린이들한테 초당 옥수수라고 경북대학 재직 시 만든 게 있어요, 그 때는 허니콘(Honey corn) 꿀 옥수수라고 했어요. 그 꿀 초당 옥수수를 100만 어린이들한테 먹이는 그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1만원이면 20명의 어린이들을 먹일 수 있는 그런 국민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처음 1998년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거(초당 옥수수)를 맛보고 굉장히 좋아해서 그 당시는 남한 자금으로 1년에 1억씩 북한에 이거(초당 옥수수)를 지원해줬는데 미국 종자였어요. 지금은 우리가 개발한 종자가 있어서 우리 종자로, 이것이 당도가 15%이기 때문에 이 옥수수를 한 10싹 정도만 먹으면 건강이 좋아질 겁니다.

내가 지금 꿈꾸는 거는 한 번만 먹는 게 아니고 이것이 북한의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식사가 될 수 있도록 하고, 포항에서 종자를 육종해 가지고가서 큰 옥수수 잡종(하이브리드)을 생산하는 겁니다. 그리고 북한의 전 6개 생태 지역별로 이것이 아주 쉽게 생산이 돼서 자기들이 먹고, 농민 시장에서 팔고, 중국 국경을 넘어서도 팔 수 있는 그런 꿀 옥수수를 생산하는 것이 제1의 목표입니다.

2019년에 550종의 옥수수를 중국 동북 3성에서 육종했는데 북한이 그 지역과 같은 기후대입니다. 그 옥수수를 북한에 줘서 안전 다수확을 하고, 또 바이오에너지로 생산하기도 하고, 나아가 한동 Black corn이라는 옥수수를 개발해서 당뇨병 같은 질병도 고치고자 하는 협력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Q2: 옥수수를 평생 연구하시고 평생 종자를 개발했다고 하셨는데, 처음 옥수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A2: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서울대학교 문과 대학원 시험을 치러 갔다가 거기 시험에 떨어져서 농촌진흥청으로 갔어요. 농촌진흥청에 가서 통일벼 만드는 인턴을 3개월 하다가 그 당시 4월에 정부 공무원 시험 최말단, 연구직 공무원 됐는데 통일벼 하는 데에 자리가 없다고. 대신 옥수수과에 자리가 있어서 옥수수로 밀려났어요.

그렇게 옥수수와 인연이 돼서 연구를 하다 보니까 고대 대학원도 다니고, 미국이 옥수수를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곳이라고 해서 이제 옥수수 공부를 미국에서도 했어요. 그래서 옥수수하고 인연이 53년째, 옥수수 연구만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Q3: 슈퍼 옥수수를 개발하신 것으로 유명하시잖아요. 슈퍼 옥수수를 개발하시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A3: 미국에 가봤더니 우리나라 옥수수보다 한 다섯 배 정도 생산량이 더 많아요. 그리고 우리나라 옥수수는 키가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들쑥날쑥한데, 미국 옥수수는 완전히 일직선으로 자라있어요. 그게 이제 하이브리드, 잡종입니다.

생산량도 엄청나게 많고 병충해에도 강한 미국 옥수수를 보고 미국이 잘 사는 것이 내가 보기엔 “제일의 경제 작물 옥수수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 못살았는데 그래서 “우리도 이 옥수수를 하면 잘 살 수 있다.” 이런 욕심을 가지고 옥수수에 매진을 한 겁니다.

김인엽 기자: 처음에는 아프리카가 아닌 우리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서, 더 잘 살기 위해서 개발을 하셨다는 말씀이시죠?

김순권 박사: 왜냐하면 그 당시 통일벼가 나와서 남쪽 평야지대에는 다수확을 하고 새마을운동도 막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산간지 특히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북부, 경기도 일부 산간농촌은 주 식량이 옥수수, 감자예요. 산간지에서는 이제 수량도 아주 떨어지고 농사도 안됐어요. 그래서 미국 가서 옥수수를 배워서 “우리 가난한 농민들을 부자 되게 해야 된다.” 이런 결심을 가지고 “내가 죽던가, 이걸 하던가.” 그런 결심을 한 거지요.

Q4: 그 이후에는 아프리카의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처음 아프리카 관련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죠?

A4: 제가 하와이 대학에서, 일리노이 대학에서 옥수수를 하도 별나게 연구를 하고 박사학위, 석사학위 연구논문이 sci 논문 8편 나올 정도로 그런 업적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미국 종자 회사들뿐만 아니라 UN연구소에서도 제가 필요한 겁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가 엄청나게 어려웠어요. 요즘 북한보다 훨씬 더 어려운 그런 상황이었는데, 제 지도교수 한 분이 “벼 육종을 하지 말고 아프리카에 옥수수를 하러 가자” 이랬어요.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가 너무 못살기 때문에 “절대 갈 수 없습니다.” 지금 무조건 이 기술을 배워 한국에 가서 우리나라부터 내가 잘 살게 하고 만약 성공하면 내가 아프리카를 돕겠다고 했어요.

근데 이제 한국에서 일이 성공하니까 계속 와달라고 하고, 가기도 전에 진급하고, 월급도 올려주고, 정말로 아주 신바람이 나는 그런 상태에서, 우리나라에서 1979년도 옥수수가 완전히 성공되었을 때 처음 UN에서 요청하고 5년 후에 아프리카를 가게 됩니다.

김인엽 기자: 그러면 아프리카 가서는 옥수수를 배급하신 거예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김순권 박사: 아니요. 거기 가서 제 전공은 그 기후 상태에서 안전 다수확을 할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하는 겁니다. 병이 나도 이기고, 벌레가 나와도 이기고, 가뭄이 와도 생산이 되고, 전천후 같은 그런 옥수수를 만드는 공부를 하와이 대학과 일리노이 대학에서 해온 건데 그걸 한국에서 성공하고 아프리카로 간 겁니다.

한국에서의 성공으로 더욱 더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 민족이 받은 빚을 내 옥수수로 아프리카에 갚는다.’ 이런 심정으로 아프리카에서 원래는 2년만 도와주기로 하고 갔는데 17년 동안 있게 됐습니다.

김인엽 기자: 아프리카 어디 계셨던 거예요?

김순권 박사: UN연구센터 본부를 나이지리아에 두고,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밑에 있는 전 나라들의 옥수수 연구를 제가 맡아서 하는 거지요.

김인엽 기자: 아프리카에서 꽤 실적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실적이 구체적으로 어땠나요?)

김순권 박사: 제가 6개월 만에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했던 거에 대해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했더니 UN연구소장이 한국에 가서 “제발 김순권 박사를 아프리카에서 일하게 놓아 달라”면서 우리 정부를 설득했어요. 그래서 원래는 휴직을 하고 갔는데, 이제 사직을 하고 아프리카의 연구를 전적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Q5: 그러면 17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옥수수를 배급을 하시고 활동을 하셨는데, 그런 걸 다 내려놓고 북한 인민들을 위해서 남한으로 귀국을 하시고 옥수수를 하셨잖아요?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A⁵: 아프리카에서 사실 나는 죽을 각오를 한 겁니다. 나이지리아 북쪽 큰 옥수수 대형농장에 그 농부들과 정부에서는 내가 죽으면 묻을 묫자리까지 해놓고, 영국 bbc 방송이 와서 그 곳을 방문을 하고 방송도 하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1994년도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고,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상당한 옥수수 혁명이 일어났어요.

이를테면, 나이지리아 같은 경우 원래 100만 톤 옥수수 생산하고 100만 톤을 수입하다가 (옥수수 혁명 이후에는) 한 700만 톤 옥수수를 생산해서 200만 톤을 수출하는 그런 나라가 됐어요.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나를 못 보낸다고 해도 저는 “내 동포가 죽어 가는데 나는 도저히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이제 한국으로 와서 무조건 북한 돕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죠.

우리 아이들이 있는 미국으로 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죠. 우리 애들을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 보내놨는데, 부모님이 미국에 와야 한다고 해도 못간 적이 많아서 미안해요. 특히 우리 딸한테 굉장히 미안한 게 막 딸이 울면서 “아빠, 아빠 미국에 와야 된다.”고 할 때 제가 “너 하나 보다 북한 아이들 5000명 살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딸이 충격을 받아서 굉장히 울고 야단이 난 적도 있어요.

김인엽 기자: 그 당시에 북한에 옥수수를 배급하고 종자를 알려준다는 게 굉장히 반대도 많았을 거고 그런 어려운 상황들이 여러 가지 있었을 텐데 어땠나요?

김순권 박사: UN에서도 네가 Korean인데 너만 가면 북한 동포들이 살 수 있다는 이런 제안들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북한 돕는 것에 대해서 국민들의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었어요. ‘가서 도와줘야 된다.’ ‘도와주지 말고 망하도록 놔둬야 된다.’라는 사람이 반반인데 그래도 저는 이제 옥수수 전문가로서 북한 동포를 살리기 위해서 북한을 돕기로 했어요.

Q6: 그러면 북한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신 게 언제였죠?

A6: 1998년 1월 23일. 김영삼 정권 말기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고 난 뒤에 5번 초청장이 왔어요. 그런데 초청장에는 심지어 ‘남조선 경북대학교’라고 써져있어서 제가 ‘국립 경북대학교’로 초청장을 바꾸라고 돌려보내고 해서 이렇게 5번의 초청장이 오고 난 뒤에 정부 허가로 북경을 통해서 북한을 가게 됐습니다.

김인엽 기자: 북한에 가셨을 때 굉장히 환영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김순권 박사: 대환영이었죠. 근데 겁도 좀 나지요. 제가 아프리카 17년 있으면서 20개의 공산국가들과 일한 적이 있어요. 그런 경험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도움이 많이 됐어요. 공산주의자들을 만나면 용감해야 되는 거예요. 북한이 저한테 ‘남조선 깡패 대장’이라고 할 정도로 제가 아주 강하게 요청할 것은 요청했어요.

또 세미나에서 “나는 우리 동포를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도 좋다”, “나와 같이 죽을 사람 나오라” 하면서 이야기했더니 북한 관리 두 사람이 손을 들면서 “왜 박사 선생님만 죽어야 됩니까.”, “우리도 같이 죽겠습니다.” 하면서 그랬어요. 그 두 사람이 남북 통일회담에 나온 북한 장관이고 개성공단 민경협 책임자예요. 북한으로 봐서는 정말로 애국인 그런 일들이 있었어요.

김인엽 기자: 북한에 총 몇 번 다녀오신 거죠?

김순권 박사: 59번 370일 북한 땅에 있었어요. 그리고 2011년부터는 중국에서 북한 관리들, 과학자들을 불러서 중국 동북 3성에서 하는 나의 옥수수 연구와 연구소를 보여주면서 교류했죠.

또 신의주 건물 사고가 났을 때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학회 옥수수 회의에 북한 관리를 네 명을 초청을 했는데 한 사람은 감기 걸려서 못 오고 통일부 허가받아 나머지 세 사람이 왔어요. 중국에서 제가 옥수수 회사를 하니까 북한과 접촉을 하고 또 통일부에 보고하고 이런 거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옥수수를 같이하면 남북관계가 어려운 정치적인 상황에서도 잘 풀려나갈 수 있는 겁니다. 북한이 꼭 필요한 것이니까요.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 이와 같이 거치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어도 옥수수 협력은 어떤 면에선 정상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북한이 꼭 필요한 거니까 자기들이 필요해서.

제가 지금 거대한 그림을 북한과 그리고 있는 것은 중국이 전 세계에서 옥수수를 제일 많이 재배합니다. 미국보다 면적은 천만 ha가 더 많아요. 4,500만ha 정도에, 옥수수 종자 시장만 해도 20조원 규모이고, 중국의 옥수수 종자 회사가 3,500개나 있어요. 그 중에 한 개가 제 종자 회사입니다.

그래서 잘하면 북한과의 통일 비용을 옥수수를 통해서 얼마든지 벌고, 북한 옥수수 증산도 할 수 있겠다 싶어요. 핵보다도 옥수수를 쏘아 올리는 것이 훨씬 더 북한 경제 발전과 세계 평화를 위해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제가 설득하고 있는 거지요.

Q7: 북한의 옥수수 재배환경과 남한의 재배환경이 많이 달랐나요?

A7: 아니요. 우리 강원도 평창, 영월, 정선에 잘 맞는 옥수수가 수원19호라고 하는 겁니다. 수원 농촌진흥청에 있을 때 만든 19번째 옥수수인데, 옥수수는 우리가 남과 북으로 갈려 있는 것도 모르는 거예요. 분단된 것도 모르고.

그 옥수수는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한 특히 산골 기후가 옥수수 재배환경에 굉장히 좋아요. 광합성을 많이 하고, 다수확을 할 수 있고, 경사가 지니까 물 빠짐이 좋고 해서. 그런 수원19호를 처음 북한에 가지고 가서 북한 전역에 강냉이19호라는 이름으로 보급했어요. 수원19호가 아니었으면 수백만의 우리 동포들이 더 굶어 죽었을 거예요.

1998년도 78개의 협동농장에 이걸 심어서 나중에 북한 거보다 23% 증산됐어요. 여기에 대해서 북한 동포들이 자기들 살려주는 우리 남한 과학자, 남쪽 동포들에 대해서 감사함을 갖기 시작한 거죠.

Q8: 북한에 옥수수를 보급했을 때 북한 정치권 내에서도 종자에 대한 반응이 좋았겠어요.

A8: 북한 보위부 직원 반응도 엄청나게 좋았어요. 잡종 하이브리드를 만드는 데는 원종들이 필요해요. 이 원종의 가치, 중요도에 대해서 북한 관리들도 너무나 잘 알아요. 남한에서 개발한 수원19호를 북한에 가져가고, 또 북한 25개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고 남북개발을 해서 나온 5만종 중에서 12개를 골라서 북한에 다시 보급을 하고 그랬죠.

김인엽 기자: 북한에서 지금도 박사님이 보급한 종자들이 많이 있겠어요.

김순권 박사: 한 번 나간 종자는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지금도 양강도19호라고 해서 있는데 그게 바로 수원19호입니다. 강냉이19호도 수원19호이고.

김인엽 기자: 그게 이름이 바뀌어서 그렇게 된 거군요.

김순권 박사: 감사히 생각하는 거는 19호 이름을 유지해준 거. 과학적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해서 감사히 생각합니다.

Q9: 옥수수를 보급을 하면서 많은 난관이나 어려움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을 거고 (대표적인 일화를 들려주시겠어요?)

A9: 여기서는 제가 새벽같이 옥수수 밭에 갈 수 있는데 평양에 도착하면 그게 안 돼요. 보통 평양을 방문한 사람은 9시가 넘어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근데 저는 건의를 해서 1시간 앞당긴 8시부터 옥수수 밭에 가고 연구를 해도 되냐고 했어요. 또 해지기 전에는 무조건 호텔로 돌아가야 되는데 저는 옥수수 연구하다가 미쳐서 좀 늦으면 그것도 된다고, 그것도 예외가 됐죠.

김인엽 기자: 북한이 필요로 하니까 되게 많은 예외를 준 것 같아요.

김순권 박사: 북한을 위해서 태풍이 왔어도 ‘죽어도 좋다’ 하면서 옥수수 연구를 하니까 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 달 동안 북한 관리들한테 “남쪽에 있는 과학자도 와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죽겠다 하는데 우리 북한 연구원들, 과학자들은 뭐 하나” 이랬어요.

그리고 또 제가 ‘과학자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제안을 했어요. 자유를 줘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과학 연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는데, (위원장이) 묘향산 입구에 ‘과학자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큰 대형 간판을 붙여 놓고 나보고 가서 확인하라고 한 그런 즐거운 일도 있었어요.

Q10: 북한에서의 어려움, 국내적인 어려움 등 말씀하셨듯이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을 텐데 그런 어려움을 이겨 낸 원동력이 있었을까요?

A10: 북한의 주 식량이 강냉이(옥수수)고 제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뭐 언제 죽어도 되고요. ‘동포를 위해서 죽어도 좋다.’, ‘죽기 전에 빨리 북한 동포를 구출해야 된다.’, ‘식량 증산을 해야 된다.’ 이런 확실한 신념, 이게 통일의 길이라는 생각이 있었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통일 약속도 했었고, 저도 핵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초기부터 계속하고 있죠. 특히 1956년 남북이 갈리고 난 뒤에 김일성 주석이 강냉이는 밥 곡식의 왕이라는 이야기를 영변 핵 단지에서 한 20km 떨어진 개천 옥수수 시험장에서 합니다. 나는 저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옥수수 연구를 밀고 나가는 거지요.

김인엽 기자: 북한에서는 옥수수를 굉장히 귀한 작물로 생각하겠어요.

김순권 박사: 그럼요. 주 식량이라니까요. 70%의 식량이 옥수수야. 고급 당원들 한 30% 쌀밥을 먹어도 나머지 70%는 옥수수 없어서 완전히 굶고 있는 거예요.

김인엽 기자: 네, 많은 인민들이 주 식량으로 옥수수를 먹고 있죠.

Q11: 북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내신 거죠?

A11: 우리 국제옥수수재단 덕분에 아직까지도 1년에 100만 톤의 옥수수가 더 생산이 될 겁니다. 또 처음에 수원19호(강냉이19호)로 시작을 해서 지금은 새로운 강냉이도 나오고. 그리고 농업을 과학적으로 하도록, 과학적인 주체농업으로 바꾸고 종자 혁명도 일으켰죠.

홍수가 나서 종자를 다 잃어버린 상태에서 종자 갖고 와서 새로운 옥수수 종자가 북한에 심기도록 했죠. 과학자들한테 자유도 줬고요. 그리고 원래 북한에서는 법적으로 밭에 콩을 못 심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옥수수 수량이 콩보다 한 세 배 정도 더 나와요. 근데 콩은 영양가가 옥수수보다 세 배 높은 거예요. 그런데 북한 입장에서는 배급에 양이 문제지 질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밭에 콩을 못 심게 되어있었는데 제가 그것도 과감하게 제안을 했죠.

옥수수 밭에 2년 동안 옥수수를 재배하고 그 다음 1년 동안에는 반드시 콩을 심도록. 그리고 심는 사람들한테는 나중에 보너스로 10% 콩을 주는 거예요. 북한에서 처음 있는 보너스예요. 그런 적이 없어요.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소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사실 농민 시장을 탄생시킨 거예요.

Q12: 박사님이 북한에서 옥수수 종자 관련 연구를 북한의 과학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북한의 과학자들도 종자 연구에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속 연구를 했을 거 같아요.

A12: 계속하지만, 옥수수 교배하는 봉투가 없고 비료도 제대로 없고 유전자원도 제한되어 있고 또 중국이 특히 옥수수에 대해서 잘 안 도와줘요.

김인엽 기자: 옥수수 종자 개발과 관련해서 잘 도와주지 않는군요?

김순권 박사: 옥수수를 가지고 북한을 컨트롤하려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좋은 건 북한에 안 주니까 저는 그게 더 화가 나서 중국 동북 3성에 회사를 세워 제가 직접 개발을 해서 북한이 중국에서 못 받는 그런 거를 넘겨주는 거죠.

김인엽 기자: 여러 가지 물자나 기술 부족으로 인해서 북한 자체적으로는 개발이 힘들다는 거죠?

김순권 박사: 왜냐하면 땅은 있지만 거기 심기는 게 중요한 건데 그 중요한 종자라든가 비료, 심지어 옥수수 잡종을 만드는 봉투라든가 이런 게 없는 거죠.

Q13: 북한 주민들이 대부분 주식으로 옥수수를 먹는데 북한 주민들은 옥수수를 주로 어떻게 먹나요?

A13: 제일 많이 먹는 게 옥수수 빵, 올챙이국수, 옥수수 밥, 또 옥수수 중에는 덩어리가 밥 비슷하게 되는 옥수수를 만들 수가 있어요. 거의 한 200종류. 북한의 주 식량이 옥수수니까 옥수수에 의한 음식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내가 한 번 물어봤더니 뭐 200종 이상의 음식을 만든다고 해요.

Q14: 옥수수를 통해서 식량난이 해결된다면 통일에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을 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시나요?

A14: 옥수수가 북한에서 재배 면적이 제일 많아요. 72만ha, 남한의 벼 재배 면적과 거의 비슷해요. 우리가 한 70만ha 정도 됩니다. 그런데 비료만 잘 주고 땅 관리만 잘하면 벼보다 더 수량이 날 수 있는 것이 옥수수예요. 옥수수 한 개만 잘해도 북한 식량 한 80%가 해결될 수가 있는 겁니다.

남북 관계가 좋아서 비료를 많이 주고 기계화 좀 되고 하면 얼마든지 북한의 식량이 증산돼요. 그리고 내가 얘기했잖아요. 중국에 거대한 옥수수 시장이 있으니까 중국에 이 종자를 수출할 수도 있습니다. 이 꿀 초당 옥수수 같은 거는 중국에서 상당히 비싸요. 한 개에 3불, 반 동에 5불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3천원 해요. 그런 거를 북한에서 생산해서 먹고, 중국에 갖다 팔면 얼마든지 북한도 잘 살 수 있는 거지요.

김인엽 기자: 북한의 식량난이 해결된다면 통일이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 거죠?

김순권 박사: 네, 훨씬 더 (가까워질 겁니다.) 사람이 먹는 게 해결돼야 서로 마음도 더 열리죠. 근데 이것이 이제 남한 동포에 의해서, 남한 정부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북한도 통일을 해야 되겠다는 의무감을 더욱더 느끼는 거죠.

김인엽 기자: 사실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와 무관하게, 북한 인민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옥수수 관련 사업이 진행되면 좋은데 그러지 못해서 (참 아쉬운 것 같아요.)

김순권 박사: 정말로 민족의 통일, 전 세계가 우리 대한민국의 통일을 원하는 겁니다. 일본이나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반대하더라도. 제가 그래서 중국에서 옥수수 연구를 열심히 (합니다.) 지금 중국에 한 50년, 1977년부터 중국 옥수수가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이 재배되도록 하는데 제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걸 중국 정부에서 인정을 하고, 나를 해외 유명 과학자로 초대도 해요.

그리고 또 러시아에서도 지금 옥수수 연구를 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옥수수 연구를 하고 있는 거는 나중의 통일에 이분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옥수수 연구를 해주면서 우리의 통일에 협력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Q15: 옥수수를 개발하시면서 북한에 수원19호(강냉이19호)를 줬다고 하셨는데, 강냉이19호가 북한의 어떤 환경과 잘 맞나요?

A15: 아주 좋아요. 강원도 평창, 영월, 정선과 비슷한 기후가 되면 남쪽보다 더 좋아요. 똑같은 비료만 주면 남쪽보다 한 10%, 20% 증산이 됩니다. 그 정도로 좋은 거예요. 북한에는 ‘깜부기병’이라고 그것이 많이 도는데, 제가 만든 거는 깜부기병에 완전히 강하도록 하고 또 가뭄이 오면 가뭄에 강하도록 하고 또 비가 많이 오면 수해 피해를 적게 봐요.

그렇기 때문에 오만 종이라는 엄청난 종류의 옥수수를 만들어서 각 지역별로 적합한 종을 개발하죠. 원산은 원산대로, 북촌은 북촌호, 청진은 청진호, 통천은 통천호, 정주는 정주호, 개성은 개성호, 해주는 해주호 이와 같이 각 지역별로 아주 잘 되고 그 기후 상태에서 심지어 그 기후가 변하더라도 안전 다수확을 할 수 있는 그런 품종을 계속 육종을 해야 됩니다.

Q16: 20명의 어린 아이들에게 초당 옥수수 보급하는 운동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운동인가요?

A16: 여기 포항에서 농민들과 계약을 해서 꿀 초당 옥수수를 20만개 생산합니다. 그걸 전량 수매를 해서 이 뒤 -20℃의 창고에 수매한 걸 저장하고 있어요. 근데 이게 제가 또 전 세계 돌아다니고 하니까 장사가 잘 안돼요. 20만개를 구입해서 파는 건 한 6만개밖에 못 팔아요. 연도가 지나니까 맛도 좀 변하고 해서.

그래서 그 사업을 중단하고 그 모든 것을 생산하는 원종에 집중했어요. 아이디어를 낸 게 미국에서 저한테 700종의 옥수수를 줬는데 그걸 우리 꿀 옥수수하고 교배를 했어요. 그러니까 북한의 각 생태 지역별로 쉽게 키울 수 있고 종자 생산도 되는 그런 옥수수 재래종 같은 걸 만드는 거를 지금 계속하고 있어요.

김인엽 기자: 그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김순권 박사: 작년부터 추진해서 벌써 모금도 한 2천만 원도 넘었어요. 서울대학교 도서관을 6백억 들여서 세워준 관정 이종환이 있습니다. 경남 의령 분인데 거기가 꿀 옥수수를 많이 생산합니다. 이분이 작년에 경남 의령 고향에 갔다가 꿀 옥수수를 먹어보고 너무 맛있다고 저를 불렀어요. 불러서 갔더니 꿀 옥수수를 북한 어린이들에게 먹이자고 했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옥수수 먹이자 이런 운동을 같이 하는데 100만명 먹이는데 한 5억이 들어요.

북한에 있는 친구 20명 먹이고 싶으면 만 원, 알맹이 하나 생산하는데 500원이 들어요. 종자 값하고 비료 값에, 또 당도가 너무 높아서 농약도 두 번 뿌려야 해요. 그러니까 그런 비용이 충당돼야 합니다. 이런 걸 국민운동으로 해야 합니다.

원래 1998년도, 제가 북한에 갔다 오고 난 뒤 4월에 서울 흥사단에서 북한 옥수수 심기를 범국민운동으로 벌였는데 그 당시에는 모금도 많이 되고 엄청나게 효과가 있었죠. 한 20억도 모금하고 해서 비료도 보내고 종자도 보내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규모는 작지만 옥수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맛도 있고 효과가 있어요. 북한의 마음을 완전히 녹이고 오픈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옥수수입니다.

Q17: 북한이 원하는 걸 가지고 우리 쥐고 있으면, 이러한 대화 방법이 북한과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A17: 제일 중요한 것은 북한이 거절할 수 없는 그런 항목을 개발해야 됩니다. 전략적으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그런 항목을 골라서 우리가 도움을 주고자 할 때 자기들도 필요하니까 거절 못하게끔. 자기들도 그랬어요. 삼성, 현대 이런 데는 아주 비밀스러운 고급 기술은 안 주는데 박사님은 다 준다고 하면서 그것 때문에 이제 나하고 신뢰가 생긴 거죠.

그래서 북한이 꼭 필요한 거 어느 분야라도 좋아요. (예를 들면) 산림 같은 것도 이제 중요해요. 중요한 건 북한 산천에 맞는 산림 묘목을 키워 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북한에 맞는 옥수수를 육종을 해서 북한에 심고 생산한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겁니다.

Q18: 간부들을 만나면서 재미있었던 일이나 그런 게 있었을까요?

A18: 그럼요. (그 사람들도) 농담 잘 하고, 도와 달라고도 해요. 어떤 사람은 농담을 너무 잘해서 통일 후 남쪽에 가서 연예인 하면 너무나 잘하겠다고 생각한 그런 사람도 있고 똑같아요. 아주 성질도 비슷하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고 그래요. 똑같아요. 성질이 급해서 한 번씩 화내는 것도 비슷하고.

그래서 우리 민족이 같은 민족이라는 거는 도저히 지울 수도 없고, 우리가 통일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통일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동독, 서독이 통일됐는데 통일되고 한 달 뒤에 전 식구를 데리고 동독 베를린을 방문했어요. 그때 동독 전철을 탔는데 동독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통일됐다고 얼마나 좋아하고 하던지 그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해요. 우리도 통일되면 독일 통일 못지않게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강국이 되고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코리안들이 될 것입니다.

김인엽 기자: 빠른 시일 내에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김순권 박사: 여기 건물에 태극기가 있고, 영일만을 향해서는 한반도기가 펄럭이고 있어요. 그 오른쪽으로 ICF기가 있고요. 원래 원산에서 옥수수를 생산하고 관광선을 이용해서 영일만으로 와요. 그 옥수수를 여기 창고에 저장하고 대구, 부산, 울산 남쪽 등 도시들에 북한 옥수수를 보급했어요. 저 개성공단 부분에서도 옥수수를 생산해서 서울 시장에 팔려고도 하고 이런 것도 북한하고 의논하고 했는데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지요. 통일 이거는 절대 포기해서도 안 되고 절대로 포기할 수도 없는 겁니다.

Q19: 옥수수 관련해서 북한과의 교류가 지금보다 더 활발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돼야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A19: 정치적으로 남북 간에 서로 화해를 하고, 어떤 사람이든 자유스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되죠. 그리고 이런 걸 잘하면 우리가 해외에 수출해서 먹고 살 듯이 북한도 그럴 수 있지요. 북한도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해서 중국에 팔고, 남한에 팔고, 일본에 팔고, 전 세계에 뭐를 팔아야 돼요. 팔아야 경제적으로 경제 발전이 되고 (하는 거죠.)

Q20: 옥수수를 오랜 시간, 긴 시간 동안 연구해 오셨는데 아직도 옥수수가 좋으신가요?

A20: 좋죠. 아무리 화나도 옥수수만 보면 웃음이 자연적으로 나와요. 옥수수가 나를 이렇게 유명하게 만들어줬잖아요. 완전 촌사람, 완전 흙수저 중에도 슈퍼 흙수저잖아요. 그런데 내가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죠. 옥수수를 싫어하면 옥수수가 얼마나 슬퍼했을까.

미국에서도 그랬어요. 학생들이 Korea S.K KIM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옥수수를 전파하기 위해 보낸 인간 괴물이라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그렇게 나를 막 놀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나는 옥수수를 가지고 정말로 통일도 시키고 많은 분들한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실제로도 우리 국제옥수수재단이 20개국(아시아 10개국과 아프리카 10개국)을 돕고 있어요. 러시아, 몽골까지도 돕고 있고 옥수수가 필요한 나라는 어느 나라든 우리가 후원을 계속해나갈 겁니다.

Q21: 마지막으로 이제 질문을 드릴 텐데요. 통일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자로서 그리고 통일을 오랫동안 바라온 통일 선배로서 지금 이 영상을 보고 있는 많은 통일 지지자분들이 계세요. 그분들께 격려 또는 조언을 한 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A21: 하루빨리 남북이 풀려서 1만원으로 20명의 북한 어린이들한테 그 영양식 옥수수를, 꿀 옥수수를 먹일 때 자연적으로 북한에서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욱 더 높아져 갈 겁니다. 통일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니까 시간이 걸립니다.

70년이 지난 통일이 지금 하루아침에는 안 이루어지더라도 저는 뭐 통일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루빨리,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도록 이 옥수수 박사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 핵심 무기가 옥수수입니다. 북한의 강냉이입니다.

김인엽 기자: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이번 달 인터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달은 ‘통일영웅’ 옥수수 박사 김순권 박사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했는데요. 관련해서 많은 도움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순권 박사: 감사합니다.


“통일영웅에게 묻다”에서는 7편의 주인공으로 국제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님을 모셔 통일한반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담아 보았습니다. 1편 짐 로저스, 2편 데일리NK 이상용 편집국장, 3편 북한이탈주민전담 김지향 상담사, 4편 그룹홈 우리집 마석훈 대표, 5편 겨레말큰사전 고대영 편집부장, 6편 여명학교 조명숙 교장, 이번 7편 국제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에 이어 다음 편에서도 또 다른 통일영웅의 목소리가 불러올 통일바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후속기사 기대해주시길 바라면서 이상 김인엽, 조보근, 하원휘 기자였습니다.

김순권박사 사진입니다.
김순권박사

 

원문 출처

https://m.blog.naver.com/gounikorea/222758242004

 

 

옥수수로 남북통일을! “통일영웅에게 묻다 –7편: 국제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

통일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경제, 민족사적,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통일은 당위성을 띠고 있는 민족의 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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